햇살과 책과 바람

산티아고 순례길 15일차 – 바람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그 언덕을 넘었다, 카스트로헤리스에서 프로미스타까지, 약 25km 본문

산티아고 순례기 - 길 위에서 다시 만난 나

산티아고 순례길 15일차 – 바람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그 언덕을 넘었다, 카스트로헤리스에서 프로미스타까지, 약 25km

아침 바다 2025. 6. 6. 09:00

부르고스(Burgos)주와 팔렌시아(Palencia)주 사이 경계 표지석 “PROVINCIA DE PALENCIA”

 

“카날 데 카스티야(Canal de Castilla)“ 인공 운하
“푸엔테 피에드라(Puente Fitero)” 또는 “이테로 다리(Puente de Itero)“로도 불림

 

언덕 앞에서 멈칫한 마음

새벽 6시 20분.
카스트로헤리스의 고요한 골목을 지나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들판으로 나섰다.
오늘은 ‘알토 데 모스타라레스’라는,
순례길에서도 손꼽히는 가파른 언덕을 넘는 날.

지도에서 볼 때는 짧은 구간이었지만
해발 900미터 가까이 단숨에 치고 올라야 하는
험한 경사라고 한다.
출발 전부터 그 언덕을 떠올리니
몸보다 마음이 먼저 긴장되었다.

가끔은,
걷기 전에 이미 지쳐버리는 순간들이 있다.


바람을 등지고, 숨을 고르고

언덕 입구에 도착했을 때,
햇살이 서서히 들판을 물들이고 있었다.
경사는 정말 가팔랐다.
마치 바닥이 하늘로 세워진 듯한 느낌.
숨이 턱턱 막히고,
등에서는 땀이 흘렀다.

몇 걸음 걷고, 한숨 돌리고.
그렇게 아주 느리게
천천히 올라갔다.

젊은 순례자들이 빠른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 갔다.
예전 같았으면 그 속도를 따라가 보려 했겠지만,
이제는 안다.
내 호흡에 맞는 속도가 결국 나를 지켜준다는 걸.

꼭대기에 도착했을 땐,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거칠게 들이마신 공기 속에서
조금의 눈물이 섞였는지도 모르겠다.

 

보아디야 델 카미노(Boadilla del Camino) 인근에서 프로미스타로 향하는 마지막 평야 구간

그저 걷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시간

언덕 너머로 펼쳐진 풍경은
마치 누군가 정성껏 그려놓은 수채화 같았다.
끝없이 펼쳐진 메세타의 평원,
곧게 뻗은 길 위에 점처럼 박힌 순례자들.

길 위에 앉아
잠시 바람을 맞으며 빵을 먹었다.
소박한 아침이지만,
배고픈 몸에게는 최고의 만찬.
아무 맛도 없는 듯한 빵조차
걸은 자에게는 깊은 풍미로 다가온다.

옆에 앉은 브라질 순례자는
조용히 기타를 꺼내 들고
작은 멜로디를 흘려보냈다.
그 선율 속에서
내 마음도 같이 걷고 있었다.


이른 오후, 물결처럼 출렁이던 운하

길은 부드러운 내리막을 타고
푸엔테 파누엘(Puente Fitero)을 지나
카리온 강을 따라 이어졌다.

드디어 프로미스타(Frómista)의 운하가 보였다.
16세기 만들어졌다는 ‘카날 데 카스티야(Canal de Castilla)’.
운하 옆으로 이어진 흙길을 걷는 느낌은
이전의 들판과는 또 다른 평화였다.

운하 위로 지나가는 작은 돌다리,
잔잔한 물소리,
그리고 물 위로 춤추는 햇살.

도시에 다다랐다는 실감보다는
마치 자연의 한가운데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프로미스타에서의 느릿한 저녁

프로미스타는 생각보다 조용한 마을이었다.
중앙에 자리한 산 마르틴 교회(Iglesia de San Martín)는
로마네스크 건축의 대표적인 건물이라고 했다.
교회 앞 벤치에 앉아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걷는 동안은 하늘을 볼 여유조차 없었구나.
오늘은 하늘이 맑았다.
그리고 그 맑음이
내 안에 조금씩 스며드는 듯했다.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에스피리투 산토 알베르게(Albergue Espíritu Santo)에 짐을 풀었다.
샤워 후
근처 식당에서 순례자 메뉴로 저녁을 먹었다.
구운 채소, 치즈 오믈렛,
그리고 리오하 와인 한 잔.

자리에 앉아 일기를 쓰는 지금,
이 와인이 오늘의 햇살만큼 따뜻하게 느껴진다.


오늘, 나는

넘어야 할 언덕을 마주하고
조금은 두려웠지만,
결국 나의 속도로 그 위를 넘었다.

누군가는 빨리 걷고
누군가는 뒤처지고
누군가는 잠시 멈추어도,

길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자신만의 걸음을 허락해준다.

그게 얼마나 따뜻한 사실인지,
오늘은 온몸으로 알게 되었다.


"카날 데 카스티야(Canal de Castilla)“의 수문(Esclusa, Lock)
“산 마르틴 데 프롬리스타 교회(Iglesia de San Martín de Frómista)“
수녀회 운영하는 에스피리투 산토 알베르게(Albergue Espíritu Santo, 프로미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