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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기 - 길 위에서 다시 만난 나

산티아고 순례길 13일차 - 황량함 속에서, 마음은 더 정직해진다, 부르고스(Burgos)에서 오르비에가(Hornillos del Camino)까지

by 아침 바다 2025.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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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스(Burgos)의 아르코 데 산 힐(Arco de San Gil)
부르고스(Burgos)의 아르코 데 산 힐(Arco de San Gil)

 

 
황량함 속에서, 마음은 더 정직해져요.
메세타 평원은 비어 있었지만, 오늘의 나는 오히려 가득해졌어요.

황량함 속에서, 마음은 더 정직해진다

산티아고 순례길 13일차|부르고스(Burgos) → 오르비에가(Hornillos del Camino), 약 21km

💡 메세타의 바람은 단순히 불어오는 공기가 아니에요.
속도를 줄이고,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하는 하나의 리듬이었어요.

📋 목차

1. 부르고스를 떠나는 새벽

새벽 여섯 시, 부르고스의 중심은 아직 깊은 잠을 자고 있었어요.
도시의 어둠은 시골의 어둠과 결이 달라서, 차가운 전등빛이 돌바닥을 미세하게 문지르듯 번지고, 가늘게 흩어진 안개가 숨결처럼 낮게 깔렸죠.
배낭을 메기 전, 손바닥으로 어깨 끈을 한 번 더 눌러 보며 무게를 가늠했어요.
익숙한 무게인데도, 떠나는 아침마다 그 무게는 왜 다른 결을 내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싶어졌어요.
“왜 오늘은 유난히 더 무겁게 느껴질까, 내가 놓고 가야 하는 무엇이 아직 내 안에서 저항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쳤죠.

2. 메세타 평원의 시작과 질문들

도시를 벗어나자 풍경은 곧 메세타의 얼굴로 바뀌었어요.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 갈색 흙과 연두빛 새싹이 서로의 경계를 부드럽게 침범하는 들판.
바람은 이미 아침부터 서슬이 퍼랬고, 먼 곳에서 마른 풀을 그슬리는 냄새가 실려 왔어요.
햇살은 따뜻하다기보다 얇은 칼날 같았는데, 그 얇음 사이로 봄의 체온이 미세하게 스며드는 게 느껴졌죠.
풍경이 단조로워질수록 마음은 오히려 풍성해졌고, 나는 내 안의 오래된 질문들과 마주했어요.
“왜 이 길을 택했을까, 왜 지금이어야 했을까, 무엇을 비우면 나는 더 가벼워질까.”

3. 바람과 속도의 의미

정면에서 몰아치는 바람이 발목과 무릎을 차례로 흔들었어요.
처음엔 이를 악물고 맞섰지만, 곧 포기했어요.
왜 바람을 이겨야 하죠, 굳이 싸워야 할까, 바람이 나를 밀어내는 게 아니라 제 속도로 가라고 인도하는 건 아닐까요.
호흡을 낮추고 발을 조금 더 짧게 디뎠을 때, 바람은 더 이상 적이 아니라 나의 리듬이 되었어요.
머리칼이 헝클어지고 바짓가랑이가 무겁게 흔들리는 순간조차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죠.

4. 오르비에가에서의 오후

오후 두 시 무렵, 오르비에가 마을이 시야에 들어왔어요.
황량한 들판 위에 단정히 내려앉은 작은 마을, 돌담 사이로 햇살이 부드럽게 흘렀죠.
가게 하나, 교회 하나, 알베르게 하나, 단출한 구조가 오히려 마음을 넓게 만들었어요.
샤워기의 물줄기가 어깨에 부딪히며 “무엇을 더 내려놓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다시 던지게 했죠.
가벼움은 씻어내는 데서 시작된다는 걸, 몸이 먼저 이해해 준 오후였어요.

5. 만남과 ‘다시 시작’의 눈빛

저녁 무렵, 알베르게에 묵는 독일인 부부와 대화를 나눴어요.
그들은 말했어요. “젊을 때는 늘 바빴어요, 서로를 천천히 보는 법을 잊었죠, 이 길에서는 다시 눈을 맞추게 돼요.”
그 말은 오래도록 남았어요.
왜 사랑은 함께 있는 동안엔 잘 보이지 않고, 떠나와 걸을 때 비로소 또렷해질까요.
그들의 눈빛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말의 두려움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비쳤어요.

6. 오늘의 성찰과 내일의 길

오늘, 나는 풍경보다 내 마음을 오래 들여다봤어요.
메세타의 단조로움은 내 안의 복잡함을 가라앉히는 침전제 같았어요.
“황량함 속에서 마음은 더 정직해져요.”라는 문장이 조용히 새겨졌죠.
내일은 카스트로헤리스까지, 풍경은 비슷해도 매일의 나는 달라질 거예요.
오늘의 흔들림은 내일의 단단함이 될 거예요.

7. 같이 읽으면 좋은 책 & 내부 콘텐츠 글 추천

와일드 — 셰릴 스트레이드 (국내 번역 출간)
혼자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걷는 여정을 통해 상실과 회복, 길 위에서 다시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았어요.
순례길의 고독과 닮은 통찰을 건네줘요.

산티아고 순례길 시리즈 모아보기
일자별 후기, 구간별 팁, 숙소·식사·예산 정보를 한 곳에 모았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흐름을 따라 읽으면 전체 루트와 난이도가 자연스럽게 그려져요.

순례길 준비 체크리스트·장비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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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1) 황량한 메세타 평원에서 마음은 더 정직해졌어요.
2) 도시는 스쳐 지나갔지만, 대성당의 웅장함은 오래 남았어요.
3) 풍경이 단조로울수록 오래된 질문이 또렷해졌어요.
4) 바람을 이기려 하지 않고 박자에 맞추니 오히려 평안했어요.
5) 작은 마을 오르비에가에서 무거움이 씻겨 내려갔어요.
6) 독일인 부부의 대화에서 ‘다시 시작’의 의미를 배웠어요.
7) 오늘의 흔들림은 내일의 단단함으로 이어질 거예요.
Tardajos(타르다호스) 마을 입구의 순례길 표지석

 

Tardajos(타르다호스)의 성모승천교회(Iglesia de la Asunció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