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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16일차 - 바람 소리만 남은 길 위에서, 프로미스타 →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약 24.6km 본문

산티아고 순례기 - 길 위에서 다시 만난 나

산티아고 순례길 16일차 - 바람 소리만 남은 길 위에서, 프로미스타 →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약 24.6km

아침 바다 2025. 6. 10. 03:51


침묵과 평화로 가득 찬 아침

새벽 6시 10분,
프로미스타의 조용한 골목을 나섰다.
전날 마신 와인이 아직도 살짝 남아 있는 듯했지만
몸은 의외로 가벼웠다.

운하 옆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 아침.
물은 고요했고, 하늘은 엷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저 발자국 소리만 또박또박, 흙길에 새겨졌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프로미스타 마을이 아침 안개에 묻혀 사라지고 있었다.
그 순간이 참, 묘했다.
하루 전, 분명 그곳에서 웃고 말했는데
이미 너무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끝없이 직선으로 뻗은 그 길

오늘 길은
단 한 번의 큰 굴곡도 없이
직선으로 이어지는 메세타의 본모습이었다.

피게루엘라스 델 캄포(Figueruelas del Campo)를 지나
레보나(Leboreda)와 같은 작은 쉼터를 통과하며
내 마음속 작은 소리들이 점점 커졌다.

도시에서는 들리지 않던,
내 안의 생각들.
멈춰있던 기억들.
그리고 가끔은 불쑥 솟아오르는 후회와 감사.

지루하다고 했던 이 길이,
나에게는 묵상 같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길고 단조로운 길 위에서는
도망칠 데 없이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엘리가르시오(Eligarcío)의 커피 한 잔

걷다 보면 마을이라기보다는
작은 건물 하나, 카페 하나로 이루어진 쉼터들이 나타난다.

엘리가르시오에서 만난 커피는
너무 평범했지만,
그래서 더 따뜻했다.

혼자 온 프랑스 여성이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이 길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조용함이에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없는 순례길은,
오히려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커피 향과 함께 그 조용함이
조금 더 내 안에 번져갔다.


하루의 끝, 다시 마을로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 들어선 건 오후 2시 무렵이었다.
이름은 낯설지만,
역사 속에 깊이 뿌리박힌 마을이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이어진 순례의 길목.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들,
작은 광장,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미소가 반가웠다.

산타 마리아 교회 앞 벤치에 앉아
오늘의 발걸음을 돌이켜보았다.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고요하고 가벼웠다.

알베르게는 정갈하고 조용한 공간이었다.

기지개를 켜며 누운 침대에서
메세타의 바람 소리가 아직 귓가에 맴돌았다.


오늘, 나는

기억도 흐릿해질 정도로
단조로운 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 길이,
오히려 내 마음의 복잡함을 정리해주었다.

어쩌면 단조로움이야말로
가장 깊은 사색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 아닐까.

걷는 것이 생각을 맑게 해준다는 말,
오늘 그 의미를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