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과 책과 바람

산티아고 순례길 14일차- 흙먼지 바람 속에서도, 길은 내 안으로 들어왔다, 오르비에가(Hornillos del Camino)에서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까지 본문

산티아고 순례기 - 길 위에서 다시 만난 나

산티아고 순례길 14일차- 흙먼지 바람 속에서도, 길은 내 안으로 들어왔다, 오르비에가(Hornillos del Camino)에서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까지

아침 바다 2025. 6. 3. 08:26

Hontanas(온타나스) 마을의 순례길 안내 벽화
Hontanas(온타나스) 마을 전경
Hontanas(온타나스)

 

 

흙먼지 바람 속에서도, 길은 내 안으로 들어왔다

– 산티아고 순례길 14일차 | 오르비에가(Hornillos del Camino) →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 약 20km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새벽 6시.

조용한 알베르게의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고 빵을 구웠다.

밤새 바람이 심하게 불었는지

창문 너머 들판에 풀들이 몽땅 한쪽으로 쓰러져 있었다.

 

오늘도 바람을 맞으며 걸을 테지.

하지만 이상하게,

이곳의 바람은

무언가를 억누르지 않고

조금씩 털어내주는 것 같다.

 

식사를 마친 뒤

오르비에가를 떠났다.

어둠과 안개가 섞인 들판,

혼자 걷는 걸음이 묘하게 가볍게 느껴졌다.

 


 

들판 위의 고독, 그리고 평화

 

길은 여전히 곧았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양 옆엔 텅 빈 들판만 끝없이 이어졌다.

 

젊은 시절 같았으면

심심하다고 투덜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단조로움이

내 마음의 소음을 덮어주는 것 같다.

 

고요함은 불안보다 더 큰 힘이 있다.

 


 

산 미겔 델 카미노에서 마주친, 소리 없는 위로

 

두어 시간을 걷자

산 미겔 델 카미노(San Miguel del Camino)라는

마을도 아닌, 폐허 같은 공간에 도착했다.

지붕이 무너진 석조 건물과

부서진 담벼락 너머로 들려오는 새소리만이

이곳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돌담에 앉아 물을 마셨다.

그리고 문득,

이런 폐허조차

과거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졌다고 다 잊히는 건 아니구나.

어딘가 남아, 이렇게 누군가의 쉼이 되기도 하니까.

 


 

우연히 마주한 바람막이와 따뜻한 스페인어

 

길가 작은 트럭 카페에서

따뜻한 ‘카페 꼰 레체’를 한 잔 주문했다.

트럭 옆에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고,

그늘막 하나 없이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마시는 커피였다.

 

커피를 건네던 중년의 스페인 아주머니가

내 배낭을 힐끗 보더니

짧게 말했다.

“당신, 얼굴이 많이 변했어요. 순례자의 얼굴이에요.”

 

무슨 뜻이었을까.

아마도 태양과 바람에 그을린 외형보다

걷는 동안 내 안에서 무언가 달라졌다는 걸

그녀는 알아봤던 걸까.

괜히 마음이 찡했다.

 


 

카스트로헤리스, 오래된 도시와 오래된 벽

 

오후 2시,

먼지 날리는 평원을 지나

드디어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에 도착했다.

 

들어가는 초입부터

중세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오래된 돌담,

바람에 삐걱이는 나무 창문,

그리고 마을 중심에 우뚝 선 산 후안 교회.

 

이곳은 예전부터 순례자들이 머무르던 장소였다고 한다.

알베르게 ‘산토 도밍고’를 찾았고,

친절한 노신사가 배정해준 침대에 배낭을 풀었다.

 

샤워를 마치고,

작은 마을의 골목을 걷는다.

창문 아래에는 꽃 화분이 하나씩 놓여 있었고,

햇살은 그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혼자 걷는 시간, 혼자 생각하는 시간

 

혼자 걷는 건 외로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건,

혼자 걷는 시간이 아니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생각들이

슬며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아무 말 없이

내 안의 오랜 그림자를

조금씩 들여다보게 되는 하루.

 


 

저녁 식사, 그리고 느릿한 하루의 끝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메뉴 델 페레그리노’로

야채 수프와 생선,

그리고 레드 와인 한 잔을 곁들였다.

창밖에는 해가 천천히 지고 있었고,

마을의 종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순례자들과 몇 마디 나누다

한국에서 왔다 하니,

스페인 아주머니 한 분이

김치를 먹어봤다며 환하게 웃었다.

이방인의 땅에서도

익숙한 이름이 누군가의 추억 속에 있다는 건

참 이상한 위로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정적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그 어떤 말보다도

조용히 스며드는 풍경과 바람이

마음을 어루만졌다.

 

혼자여도 괜찮다는 확신.

그리고

걷는다는 것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를

다시금 새겼다.

 

내일은

카스트로헤리스를 지나

알토 데 모스타라레스(Alto de Mostelares)를 넘는다.

또 다른 언덕, 또 다른 하루.

나는 준비되어 있다.

 


산토 안토니오 데 파디아 수도원(Monasterio de San Antón)
산토 안토니오 데 파디아 수도원(Monasterio de San Antón)
카스트로헤리스 언덕 위 성채(Castillo de Castrojeri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