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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13일차 - 황량함 속에서, 마음은 더 정직해진다, 부르고스(Burgos)에서 오르비에가(Hornillos del Camino)까지 본문
산티아고 순례길 13일차 - 황량함 속에서, 마음은 더 정직해진다, 부르고스(Burgos)에서 오르비에가(Hornillos del Camino)까지
아침 바다 2025. 6. 3. 08:13
황량함 속에서, 마음은 더 정직해진다
– 산티아고 순례길 13일차 | 부르고스(Burgos) → 오르비에가(Hornillos del Camino), 약 21km
도시를 떠날 때, 뒷모습은 더 길게 남는다
새벽 6시.
부르고스의 중심에서 다시 짐을 챙겼다.
도시의 어둠은 시골의 어둠과 달라서
차가운 빛들이 조용히 도로 위에 흘러 있었다.
문득, 이 도시를 그냥 스쳐 지나온 것 같아
살짝 아쉬움이 남았다.
대성당의 첨탑이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젯밤, 그 웅장한 고딕의 조각들 앞에 섰던 순간이
아직도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커피 한 잔으로 몸을 깨우고,
익숙한 배낭의 무게를 다시 어깨 위에 얹었다.
이제 메세타의 시작이다.
단조로운 길, 더 깊어지는 생각들
도시를 빠져나오자,
곧 메세타(Meseta)의 풍경이 시작되었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
갈색과 연두가 뒤섞인 들판.
3월의 햇살은 아직 따뜻하기보다 날카로웠지만,
그 속에 봄이 서서히 녹아들고 있었다.
길은 평탄했고,
사람도, 차도, 건물도 점점 사라졌다.
이런 길을 걷다 보면
풍경보다 자신의 생각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젊었을 땐 피하려 했던 질문들이
지금은 천천히 걸으며 마주할 수 있다.
그게 이 나이의 걷기다.
강한 바람, 느려진 걸음
들판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강했고,
정면에서 불어올 때면
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처음엔 속이 타는 것 같았지만,
이내 포기했다.
바람을 이기려 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
귀에 스치는 바람소리,
무겁게 흔들리는 바지 자락.
그 모든 것들이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작은 마을, 따뜻한 한숨
오르비에가(Hornillos del Camino)에 도착한 건
오후 2시 무렵.
황량한 들판 위에
조용히 자리 잡은 작은 마을.
돌담 사이로 햇살이 흘렀고,
가게 하나, 교회 하나,
그리고 순례자들을 위한 알베르게가 전부였다.
이런 곳에서는
자연히 말이 줄고,
몸도 마음도 조용해진다.
알베르게에 체크인하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발바닥에 붙어 있던 먼지보다
마음에 붙어 있던 무거운 것들이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오르비에가의 오후는 아주 느리게 흐른다
조용한 골목을 걷다가
작은 광장의 벤치에 앉았다.
햇살 아래,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보았다.
파란 하늘에
까마귀 몇 마리가 맴돌고 있었다.
바람은 여전히 거셌지만,
오늘은 그조차도 위로처럼 느껴졌다.
같은 알베르게에 묵는 독일인 부부와
잠깐 대화를 나눴다.
그들도 나와 비슷한 나이였고,
이 길을 걷는 이유는
‘서로를 다시 알아가기 위해서’라고 했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기에
이 길만큼 좋은 곳도 드물다는 데
우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풍경보다 내 마음을 오래 들여다본 날이었다.
자극도, 색도, 소리도 적은 이 평원 위에서
나는 더 정직해졌다.
속도를 줄이고,
호흡을 고르고,
생각을 들여다보며 걸었다.
젊을 땐 멈추면 불안했지만,
이제는 멈춰야 비로소 들리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안다.
내일은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까지.
비슷한 풍경이 이어지겠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되겠지.
오늘도, 잘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