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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21일차 - 도시로 들어서며, 다시 나를 마주한다–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 → 레온(León) | 약 18km 본문

산티아고 순례기 - 길 위에서 다시 만난 나

산티아고 순례길 21일차 - 도시로 들어서며, 다시 나를 마주한다–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 → 레온(León) | 약 18km

아침 바다 2025. 6. 21. 18:00

 

 

아침, 그 조용한 출발

밤새 바람이 불었는지,
창문 너머 나뭇가지가 서걱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 공기가 뺨을 스쳤고,
그 차가움이 오히려 상쾌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아침을 준비하는 순례자의 손이 익숙해졌다.
물통을 채우고,
트레킹화를 조여 매며,
잠든 마을을 조용히 떠나는 이 짧은 의식.

오늘은 유난히 발걸음이 가벼웠다.
가깝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도시로 향하는 길목

초반 몇 킬로는 평탄했다.
길은 좁은 시골 도로를 따라 이어졌고,
좌우로는 마른 풀밭과
간간이 보이는 황소 목장의 담장이 스쳐갔다.

도시가 가까워질수록
풍경이 조금씩 변해갔다.
고요하던 길에 차 소리가 섞이고,
순례자보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많아졌다.

삶의 리듬이 달라지는 순간들.
그 낯선 속도가
조금은 어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들숨과 날숨 사이, 되묻는 길

걷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시는 정말 목적지일까?”

여기까지 오며 지나온 마을들,
작고 조용했지만 마음을 채워주던 공간들.
이제 커다란 도시로 들어가는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편안함일까,
혹은 다시금 낯선 익숙함에 몸을 던지는 모험일까.


레온, 돌과 유리의 도시

오전 10시 무렵,
레온(León)의 입구에 도착했다.
순례자 조형물이 반겨주었고,
차들이 붐비는 거리를 지나
도시의 품으로 들어섰다.

거대한 돌 성벽,
좁은 골목,
그리고 눈부신 스테인드글라스가 기다리는
산타 마리아 대성당(Catedral de León).
한참을 바라봤다.
빛을 품은 건축은, 마치 신의 시선 같았다.


성당 옆 벤치에서

백팩을 내려놓고,
성당 앞 벤치에 앉아 쉬었다.
사람들은 빠르게 지나가고,
나는 느리게 앉아 있었다.

도시의 소음은
메세타의 바람 소리와 달랐다.
복잡한 감정들이 얽힌 소리.

그래서일까.
레온의 첫 시간은
마치 시장통에 던져진 고요 같았다.


오늘은 쉬어도 좋다

알베르게에 도착한 후,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빨래도 미뤄두고,
블로그도 쓰지 않고,
그냥 거리를 걷고,
가끔 커피 한 잔 마시는 하루.

가장 인간적인 여유가
이 도시 한가운데서 찾아왔다.


타파스와 와인, 그리고 노을

저녁에는
성당 근처 작은 바에서
타파스와 지역 와인을 주문했다.
익숙한 모르시아(순대)와 감자 요리,
작은 잔에 담긴 짙은 붉은빛.

이 도시에 와서 처음으로
조금 웃음이 나왔다.
내 안의 긴장이,
타파스 한 점에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식당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분홍빛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그 순간,
내 안에도 노을이 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