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햇살과 책과 바람

산티아고 순례길 24일차 - 마음이 먼저 앞서지 않도록– 비야다랑카 델 파라마오 → 아스토르가(Astorga) 본문

산티아고 순례기 - 길 위에서 다시 만난 나

산티아고 순례길 24일차 - 마음이 먼저 앞서지 않도록– 비야다랑카 델 파라마오 → 아스토르가(Astorga)

아침 바다 2025. 6. 27. 08:25

 

느린 출발, 낯선 고요

아침 공기가 유난히 차가웠다.
비야다랑카 델 파라마오의 작은 알베르게를 나서는데
하늘은 흐릿했고, 주변은 적막했다.
순례자 몇 명이 앞서 걷고 있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 뒤를 따라 걷기보단
혼자만의 속도로 걸어야 할 것 같았다.

하늘이 흐려도
걷기엔 더없이 좋은 날씨다.
햇빛은 약했고,
몸은 어제보다 가벼웠다.
60대의 체력으로는 이런 날씨가 참 고맙다.


작은 마을들, 길 위의 숨결

오늘 지나온 마을들,
산타 카테리나 데 솜포르(Santa Catalina de Somoza)와
에레라(Herrera)는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안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서 만난 노부부는
줄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작은 텃밭을 일구고 있었다.
우리를 보며 인사 대신
조용히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동작 하나에 따뜻함이 묻어났다.

길가에 핀 노란 들꽃,
그리고 부드럽게 흔들리는 밀싹.
이 길을 걸으면,
이토록 평범한 것들이
어쩌다 보석처럼 다가온다.


조금씩 오르는 길

산티아고 순례길 중
‘드넓은 평지의 끝’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지금까지 펼쳐졌던 메세타가
서서히 지고,
눈앞에 완만한 언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르막이 급하진 않았지만,
60대의 무릎엔
작은 경사도 서서히 무게로 쌓였다.
스틱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찍으며
페이스를 잃지 않으려 애썼다.

중간중간 숨을 고르며
뒤돌아보면
아득히 펼쳐진 평원이
이제 작고 멀게 보였다.

내가 저 길을 걸어왔다니.
다시 한번 놀랐다.


아스토르가, 따뜻한 도시

오후 3시경,
드디어 아스토르가(Astorga)의 붉은 지붕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은 작지만
어딘지 정갈하고 품격이 있었다.
순례자들을 위한 이정표들이 잘 정리되어 있고,
거리는 조용히 흐르는 음악처럼 평온했다.

알베르게 ‘산 하비에르(San Javier)’에 도착해 체크인.
깔끔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오늘 하루의 피로를 편안히 받아주었다.
샤워 후 잠시 침대에 누워
창문 너머 하늘을 올려다봤다.
회색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저녁, 광장에서의 시간

아스토르가의 중심 광장에는
작은 카페들이 모여 있었다.
바로 옆에는 웅장한 아스토르가 대성당(Catedral de Astorga),
그리고 가우디가 설계한 비숍 궁(Palacio Episcopal)이 있다.

성당 앞 벤치에 앉아
조용히 타파스를 즐겼다.
‘치스토라’(스페인식 소시지)와
따뜻한 감자 요리.
그리고 진한 리오하 와인 한 잔.

광장을 지나가는 사람들,
지나가는 말 한마디 없이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오늘은 그저,
마음이 먼저 앞서지 않도록
조용히 따라가는 하루였다.


밤, 느릿한 숨

알베르게로 돌아와 일기를 썼다.
오늘은 24km 정도를 걸었다.
특별한 사건은 없었지만,
어느 날보다 깊은 하루였다.

세상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그저 걷고, 바라보고,
느끼는 것으로 충분한 날.

침대에 눕자
다리는 천천히 무거워졌고,
마음은 천천히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