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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6일차 - 에스텔라에서 로스 아르코스까지, 와인과 고요의 길 본문

산티아고 순례기 - 길 위에서 다시 만난 나

산티아고 순례길 6일차 - 에스텔라에서 로스 아르코스까지, 와인과 고요의 길

아침 바다 2025. 5. 24. 09:16

 

이레체 포도주 샘

 

"순례자여! 산티아고에 힘과 활기를 가지고 도달하고 싶다면 이 훌륭한 와인을 한 잔 마시고 행복을 위해 건배하라”

 

산티아고 순례길 6일차

 

에스텔라에서 로스 아르코스까지, 와인과 고요의 길

 


 

아침, 조금은 가벼운 발걸음

 

어제 샀던 허브 크림이 효과를 발휘한 걸까.

밤새 통증이 가라앉았고, 발의 붓기도 한결 줄었다.

작은 회복이 오늘 하루를 기대하게 했다.

 

에스텔라의 아침 시장은 활기로 가득했다.

염소 치즈 한 조각과 갓 구운 바게트 한 덩이.

그날의 첫 끼니는 단출했지만,

치즈의 진한 풍미에 기분도 따뜻해졌다.

 

“부엔 카미노!”

치즈를 건네주던 할머니의 인사가

하루 종일 마음에 남았다.

 


 

이레체 수도원, 그리고 와인의 샘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고요히 모습을 드러낸 이레체 수도원(Monasterio de Santa María de Irache).

11세기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세운 이곳은

로마네스크와 고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건축이었다.

 

회랑의 아치마다 스며든 빛이

마치 시간의 결을 따라 흘렀다.

정원에 잠시 앉아,

중세의 순례자들도 이곳에서

숨을 고르고 치유받았겠지, 그런 상상을 했다.

 

맞은편에는 그 유명한 와인 샘(Fuente del Vino).

한쪽은 물, 한쪽은 와인.

간판 위의 문구가 인상 깊었다.

 

“순례자여! 산티아고에 힘과 활기를 가지고 도달하고 싶다면
이 훌륭한 와인을 한 잔 마시고 행복을 위해 건배하라.”

 

전통을 따라, 한 모금.

레드 와인의 따뜻한 기운이 속으로 번져갔다.

 


 

포도밭 사이의 오전

 

길은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 사이로 이어졌다.

아직 잎을 틔우지 못한 나무들이지만

가지마다 농부의 손길이 느껴졌다.

이 땅은 여전히,

리오하 와인의 시간 속에서 숨 쉬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고, 공기는 선명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빌라마욘 데 몬하르딘(Villamayor de Monjardín)**에 도착했다.

언덕 위엔 9세기 성채가 우뚝.

한 시간 반을 더 오르면 오를 수 있다 했지만,

오늘은 그저 올려다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무어인의 샘에서

 

마을을 지나 걷다가

길 옆 숲속에 숨어 있던 **무어인의 샘(Fuente de los Moros)**을 만났다.

이중 아치의 돌 구조물,

12세기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

 

바위에 걸터앉아

차가운 물로 손을 씻었다.

햇살 아래, 오래된 샘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조용히 마음을 씻어주었다.

 


 

작은 경련, 그리고 혼잣말

 

산솔(Sansol) 근처.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시간,

갑자기 종아리에 쥐가 났다.

 

물을 조금씩 마시고

몸을 천천히 풀었다.

잠시 그늘에 앉아 있으니,

‘혼자 걷는다는 건

이런 순간들을 스스로 넘기는 일이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럴수록 이 길이

더 내 것이 되어가는 듯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 와인의 위로

 

로스 아르코스가 가까워질 무렵,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리고 한 줄기 소나기.

비옷을 꺼낼 틈도 없이

반쯤 젖은 몸 위로 비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상하게 춥지 않았다.

이레체에서 담아온 와인을

물병 뚜껑만큼 꺼내 마셨다.

몸이 다시 따뜻해졌고,

세상이 더 선명해졌다.

 

젖은 돌길 위에 햇살이 스며들자

물방울들이 반짝이며 춤추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이 축복처럼 빛나는 순간.

 


 

로스 아르코스, 아치의 도시

 

오후 3시경,

드디어 **로스 아르코스(Los Arcos)**에 도착했다.

이름처럼, 곳곳에 아치형 건축물이 숨어 있는 고요한 마을.

중앙 광장에는 웅장한 산타 마리아 교회가 있었다.

 

돌계단에 앉아 바라본 광장엔

아이들이 공을 차며 뛰어놀고 있었다.

그 평범한 풍경이

순례자인 나에겐 더없이 따뜻했다.

 


 

고요한 수도원 숙소

 

숙소는 알베르게 라 푸엔테(La Fuente).

16세기 수도원을 개조한 고풍스러운 곳.

올리브나무와 무화과가 자라는 작은 중정엔

작은 분수가 조용히 물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다행히 발에는 새 물집이 생기지 않았다.

점점 내 몸이 이 길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증거.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석양의 교회, 별빛의 광장

 

해 질 무렵,

다시 산타 마리아 교회를 찾았다.

촛불 사이로 빛나는 제단,

바로크 양식의 화려함이

오늘 하루의 고단함을 천천히 감싸주었다.

 

한쪽에 서 있던 산티아고 성인 조각상 앞에서

몇몇 순례자들이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 장면이 오래도록 눈에 남았다.

 


 

리오하의 맛과 대화

 

저녁은 광장의 레스토랑 **엘 푸엔테(El Puente)**에서.

쵸리세로 아 라 리오하나,

파프리카의 단맛과 매콤함이 어우러진 소시지 요리.

멘추카, 감자와 고추의 소박한 조합.

 

함께 마신 리오하 와인

오늘 하루를 마무리해주는 완벽한 한 잔이었다.

아침의 와인보다 깊고 풍부했다.

바닐라 향, 오크통 숙성의 여운이

입 안에 오래 남았다.

 


 

열 번째 순례자의 이야기

 

옆 테이블의 스페인인 카를로스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이번이 열 번째 순례예요.

매번 루트도, 계절도 달라요.

하지만 매번 새로운 교훈을 줍니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서두르지 말고, 매 순간을 즐기세요.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이 중요하니까요.”

 

그 말이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혼자 걷고 있지만,

우린 모두 함께 걷고 있다는 그의 말도.

 


 

별들의 길 아래서

 

밤이 찾아오고,

테라스에서 올려다본 하늘엔

수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이 길의 다른 이름,

Camino de las Estrellas – 별들의 길.

은하수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중세의 순례자들처럼

지금의 나를 이끌고 있었다.

 


 

작은 승리, 큰 기쁨

 

오늘은 많이 걷지 않았지만,

아프지 않았고,

넘어지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몸이 이 길에 익숙해질수록

마음도 이 길을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이레체 수도원

 

무어인의 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