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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 책과 바람
산티아고 순례길 9일차 - 닿을 듯 말 듯한 별빛 아래서, 나헤라(Nájera)에서 그라논(Grañón)까지 본문
산티아고 순례길 9일차 - 닿을 듯 말 듯한 별빛 아래서, 나헤라(Nájera)에서 그라논(Grañón)까지
아침 바다 2025. 5. 27. 06:57
차가운 안개를 따라
아침 일찍,
나헤라(Nájera)의 고요한 새벽을 깨고 길을 나섰다.
나하리야(Najarilla) 강 위로 안개가 피어올랐다.
3월 초의 아침 공기,
차갑고 투명한 그 바람이 코끝을 찔렀지만
심장은 묘하게 따뜻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원래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
하지만 발걸음이 생각보다 가볍다.
오늘은 조금 더 걸어보기로 했다.
푸른 싹, 따뜻한 상추
아세오폰세(Azofra)까지 이어진 길은
보리밭과 텅 빈 들판이 나란히 펼쳐진 평야.
갈색 흙 위로
초록빛 보리 싹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직 모든 게 시작점에 있는 봄의 풍경.
한 농부가 온실에서 키운 상추 몇 장을 나눠줬다.
햇빛도 부족한 계절이지만
그 상추는 아삭했고, 상큼했다.
이른 봄의 정직한 맛.
아세오폰세의 광장에서 물을 채우고
작은 카페에서 마신 커피 한 잔.
뜨거운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는 그 짧은 순간이
순례자에겐 가장 깊은 휴식이다.
같은 길, 다른 마음
카페에서 만난 프랑스인 필립.
그는 이번이 세 번째 산티아고 순례라고 했다.
“같은 길이지만,
매번 전혀 다른 것을 마주하게 돼요.”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아마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
같은 하루라도,
마음이 다르면 전혀 다른 풍경이 보이는 법이니까.
인공과 자연 사이
치리베가(Cirueña)를 지나는 길은
골프장 옆을 스쳐 지나간다.
푸른 잔디가 정돈된 풍경,
그리고 그 옆에 그대로 놓인 들판의 갈색 땅.
인공과 자연,
두 세계가 어색하게 맞닿아 있었다.
조금은 낯설고
조금은 씁쓸한 감정.
하지만 이 또한 지금의 순례길이다.
세상은 계속 바뀌고,
길은 그 변화를 고스란히 품는다.
살아있는 닭의 성당
오후 2시,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 도착했다.
이 도시는 성 도밍고가
순례자들을 위해 다리와 병원을 세웠던 곳.
그 중심에 선 대성당(Catedral de Santo Domingo de la Calzada)은
겉모습도 웅장했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끈 건
성당 안의 닭장.
전설 속 살아난 닭 이야기.
“이 접시의 구운 닭이 살아나면,
그 청년도 살아있을 것이다.”
실제로 움직이는 닭과 암탉이
유리장 안에서 깃털을 털고 있었다.
전설이 단지 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뜨거운 스튜, 따뜻한 결심
광장의 작은 식당에서
카파라초(Caparrones) 한 그릇.
콩과 소시지가 푹 익은 스튜는
3월의 서늘한 몸을 천천히 녹여주었다.
빵을 찍어 먹으며
조용히 오늘의 발걸음을 정리했다.
몸도 괜찮고, 아직 해도 남았다.
결국 나는 다시 배낭을 메고
그라논(Grañón)을 향해 걸었다.
오후 햇살과 순례자의 그림자
산토 도밍고를 떠나
들판 사이로 길은 이어졌다.
해가 기울며
갈색 대지 위로
연한 금빛이 부드럽게 쏟아졌다.
순례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나도 그들처럼 이 길을 걷고 있다.
수백 년,
이 길 위를 지나간 수많은 발자국들.
그 발걸음들이 지금 나와 어깨를 나란히 걷는 듯했다.
다락방의 저녁, 교회의 밤
저녁 무렵,
그라논(Grañón)에 도착했다.
작은 언덕 위 마을,
붉게 물든 하늘과 오래된 돌집들의 실루엣.
한 장의 그림 같았다.
오늘 묵을 곳은
산후안 바우티스타 교회(Iglesia de San Juan Bautista) 다락방을 개조한
알베르게 파로키알(Albergue Parroquial).
난방도, 샤워 시설도 기본만 갖춘 곳이지만
그곳엔 특별한 온기가 있었다.
모든 순례자들이 함께 저녁을 준비하고,
하나의 테이블에서 나눈 파스타와 빵, 샐러드.
그리고 식사 후,
원형으로 둘러앉아 각자의 사연을 나누는 시간.
키요시의 이야기
일본에서 온 키요시(Kiyoshi).
그는 아내를 잃은 뒤,
고요한 슬픔을 안고 이 길에 들어섰다 했다.
“처음엔 도망치는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그녀와의 시간을 더 깊이 떠올릴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으로 걷고 있어요.”
그의 말에
순례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말 없는 공감이,
공기처럼 방 안을 채웠다.
오늘, 나는
취침 시간이 되어
교회의 종이 울렸다.
다락방 창문을 열자,
밤하늘에 별이 쏟아질 듯 빛나고 있었다.
9일.
이 길에 들어선 지 어느덧 아홉 번째 밤.
처음에는 상상도 못 했던 것들로
이 여정은 가득 차 있다.
물집도, 땀에 젖은 옷도,
불편한 잠자리도
이젠 모두 이 길의 일부.
그리고 내가 이 여정에 점점 젖어들고 있다는 증거.
별빛 아래서 조용히 기도했다.
내일의 풍경도, 사람도
고맙게 맞이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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