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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기 - 길 위에서 다시 만난 나

산티아고 순례길 5일차 -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에스텔라까지, 포도밭과 고요의 길을 지나

by 아침 바다 2025.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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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다리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산티아고 교회(Iglesia del Crucifijo 또는 Iglesia de Santiago)“의 종탑

 

 
비어 있음이 약속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어요.
오늘의 걸음은 바로 그 순간을 찾아가는 길이에요.

산티아고 순례길 5일차|푸엔테 라 레이나 → 에스텔라, 겨울 끝자락의 포도밭과 고요의 길을 지나요

강을 건너 마음을 건너, 하루만큼의 질문을 걷어요

💡 오늘의 한 줄
길은 움직이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지도예요, 느리게 가야만 보이는 것들이 오늘의 보상이었어요.

📋 목차


1. 여명의 다리와 첫 질문

2019년 2월 중순의 차가운 새벽 공기가 목구멍을 스치며 맑게 울렸어요.

숙소 문을 여는 순간 금속 손잡이에서 전해지는 냉기가 손끝을 맴돌았고 숨은 얇은 흰 안개처럼 흩어졌죠.

오늘의 여정은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서 에스텔라(Estella)까지 약 22Km예요.

손목 시계는 여섯 시를 조금 넘겼고 어둠은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어요.

아직 잠든 마을이 숨을 고르는 소리까지 들릴 듯 고요했죠.

돌아나간 골목 끝에 ‘여왕의 다리’가 기다리듯 서 있었어요.

아치형 돌다리는 밤새 머금은 습기를 내며 은근한 광택을 뿜었고 강 위로 내려앉은 새벽빛이 한 겹 더 얇아진 비단처럼 물결을 어루만졌죠.

아르가 강의 물소리는 낮게 깔린 첼로 같았고 난간에 손을 얹으니 차가운 돌의 온도가 곧 내 맥박과 섞였어요.

잠깐 스스로에게 물었어요.

나는 왜 지금 이 다리를 건너려는 걸까요.

목적지는 저쪽이지만 건너는 행위 자체가 내 안의 무언가도 함께 넘기게 하는 건 아닐까요.

강과 강 사이를 연결하듯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을 이어주는 게 순례의 시작일지도 모르겠어요.

새벽 출발 전엔 헤드랜턴과 반사띠를 준비해요.
이른 시간의 교차로와 다리는 빛이 부족해 시야 확보가 중요해요.
여왕의 다리(Puente de la Reina)는 11세기 로마네스크 양식 다리로 알려져 있어요.
강을 건너며 오늘의 마음을 가볍게 정리해 보는 루틴을 추천해요.

2. 겨울 끝자락의 포도밭

도시의 경계가 끊기자 흙냄새가 먼저 길을 열었어요.

포도나무들은 가지를 깊게 전정한 채 겨울을 건너고 있었고 덩굴 사이사이에 흰 서리 조각이 남아 있었죠.

2월의 포도밭은 열매를 내려놓은 빈 잔 같았지만 그 빈자리는 이미 여름을 향한 약속으로 은은하게 부풀어 있었어요.

발밑의 토양은 밤사이 냉기를 품어 서늘했고 발걸음이 닿을 때마다 얇게 마른 흙이 바스락 작게 울렸죠.

멀리서 날아든 갈매기 울음이 높게 균열을 내고 아무도 없는 들판에 바람이 지나가며 잔가지를 흔들었어요.

눈으로는 삭막해 보이는데 왜 가슴은 이상하게 따뜻했을까요.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걷는 일이 우리를 견디게 해줘서일 거예요.

지금은 비어 있어도 곧 채워질 것을 아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순례의 첫 번째 와인이었어요.

3. 마놀로스의 분수와 길의 본질

마놀로스(Mañeru)에 닿자 비좁은 돌길 사이로 어제의 비가 남긴 어두운 흔적이 지그재그로 그려져 있었어요.

광장 분수에 손을 대니 금속 수도꼭지에서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고 차가운 물이 병벽을 치며 울리는 소리가 맑게 번졌죠.

회색 수염을 기른 안드레아스가 어깨끈을 고쳐 매며 웃었어요.

“10년 전에도 이 길을 걸었어요, 풍경은 바뀌어도 길의 본질은 그대로예요”라며, 그의 눈빛은 오래된 지도처럼 잔잔했어요.

그 말을 들으니 또 물음이 떠올랐어요.

길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표지판과 골목, 카페와 숙소가 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어떤 것, 아마 ‘다시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찾는 건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바뀌는 나 자신이었어요.

물가의 급수 포인트는 마을 초입과 광장 주변에 많아요.
병을 자주 리필하고 전해질 캔디를 소량 섭취하면 겨울철 탈수를 예방할 수 있어요.

4. 시러우키의 로마 도로

오르막이 길게 이어져 시러우키(Cirauqui)에 들어설 때 바람이 모서리마다 걸려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었어요.

구불구불한 골목은 빨래줄과 붉은 지붕, 오래된 현관문 손잡이의 닳은 무늬로 그 시대를 말해줬죠.

마을을 빠져나오는 길목에서 로마 시대의 석조 도로가 모습을 드러냈어요.

돌과 돌 사이에 낀 이끼가 얇게 반짝였고 물기가 남은 돌은 유광처럼 미끄러웠어요.

2천 년 전의 군화 자국과 수레바퀴의 흔적을 상상해 보니 심장 박동이 한 박자 빨라졌어요.

왜 오래된 것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질까요.

시간이 우리를 압도하기 때문이 아니겠죠.

오히려 내가 지금이라는 시간의 얇은 막 위를 걷고 있음을 깨닫게 해서일 거예요.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발길에 밟히는 흔적을 남기겠죠.

그 생각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어요.

젖은 석조 길은 미끄러워요.
보행용 스틱의 러버팁과 미드솔 접지 상태를 수시로 확인해요.

5. 리에구의 따뜻한 점심

리에구(Lorca)의 작은 바에 들어서자 문 위 난방기에서 내려오는 미지근한 공기가 금방 얼굴을 녹였어요.

보카디요 데 토르티야의 달걀향과 감자의 담백함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퍼졌고, 차가운 맥주가 목을 지나갈 때 식도의 한기와 머릿속의 열기가 균형을 찾았죠.

양말을 벗어 발을 살폈어요.

물집은 여전히 단단한 둥근 달처럼 붙어 있었지만 큰 통증은 아니었어요.

여기에 또 질문이 생겼어요.

아픈데도 왜 계속 걸을 수 있을까요.

멈추면 길이 사라지기 때문이겠죠.

길은 움직이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지도였어요.

지도는 종이가 아니고, 오늘의 의지로 펼쳐지는 문장이었어요.

6. 비야투에르타로 향하는 황금빛 들판

비야투에르타(Villatuerta)로 이어지는 들판은 겨울빛의 황금이 얇게 깔린 바다 같았어요.

그늘 하나 없는 길은 태양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공기에서 약간의 건조한 풀향을 끌어올렸죠.

모자챙 아래로 땀이 이마를 타고 내려오고 소금기가 입술에 얇은 테를 만들었어요.

물병에서 튀어나온 작은 기포가 투명하게 올라붙고, 마실 때마다 복부에 차갑고 둔한 시원함이 둥글게 번졌어요.

속도를 낮추자 심장 소리가 규칙을 되찾았고 발뒤꿈치가 흙을 눌렀다가 놓을 때마다 ‘괜찮아, 지금 이대로’라는 속삭임이 몸 안쪽에서 들렸죠.

빠르게 가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잖아요.

느리게 가야만 보이는 것들이 오늘의 보상이었어요.

7. 에스텔라의 저녁과 회랑의 침묵

늦은 오후, 에스텔라의 지붕들이 햇빛의 마지막 층을 받아 붉은 갈색으로 빛났어요.

‘나바라의 톨레도’라는 별명은 과장이 아니었어요.

도시 초입의 푸엔테 로마노를 건너며 또 하나의 시간을 통과했다는 느낌이 또렷했죠.

알베르게 산 미겔의 두꺼운 돌벽은 낡았지만 안쪽 공기는 말끔했고, 샤워 물줄기가 등뼈를 타고 흐를 때 오늘의 피로가 한 겹씩 벗겨졌어요.

가벼운 옷을 걸치고 구시가지를 산책하니 노란 가스등 불빛이 돌바닥에 동그랗게 번지고 창문 안쪽에서는 접시 부딪히는 소리가 작은 박자처럼 이어졌죠.

산 페드로 데 라 루아(Iglesia de San Pedro de la Rúa)의 회랑에 서니 기둥머리의 조각이 긴 기도를 품은 입술 같았어요.

손을 얹자 돌은 서늘했지만 이상하게 따뜻했어요.

사람들은 왜 이런 성소에서 마음을 내려놓을까요.

아마도 시간 앞에서 작아지는 순간을 사랑하기 때문이겠죠.

작아질수록 넓어지는 마음의 방이 분명히 있어요.

저녁은 산티아고 광장 근처에서 포차와 피킬로로 채웠어요.

스튜의 따뜻한 김이 코끝을 간질이고, 속을 채운 작은 고추의 달큰함이 혀끝에서 맴돌 때 현지 와인 한 잔이 오늘의 결론처럼 깔끔하게 닫아줬죠.

옆 자리 프랑스 가족의 아이들이 포크를 장난감처럼 휘두르다 금세 얌전히 접시를 비웠어요.

“처음엔 불평이 많았는데 지금은 누구보다 잘 걸어요”라는 부모의 말에 미소가 났어요.

가족이 걷는다는 건 서로의 속도를 배워가는 일이라는 걸 그들의 발걸음이 보여줬어요.

사랑은 같은 거리를 다른 속도로 걸을 때 생기는 간격을 다정하게 메우는 기술이겠죠.

에스텔라는 ‘나바라의 톨레도’라 불려요.
구시가지의 성당과 회랑은 해질 무렵 조명이 아름다워 사진 촬영 최적의 시간대예요.

8. 다섯 번째 밤과 내일의 준비

어둠이 한 겹 더 짙어지자 에스텔라의 밤은 소리를 낮췄어요.

광장 벤치에 앉아 종소리를 들으니 금속과 공기의 떨림이 도시의 숨과 섞였죠.

다섯 번째 밤이에요.

생장피에르포르를 떠나던 그 막막함은 윤곽을 흐리며 뒤로 물러섰고 대신 조용한 질문들이 또렷해졌어요.

나는 왜 걷고 있을까요.

무엇을 놓고 무엇을 데려가려는 걸까요.

답은 여전히 멀었지만 한 가지는 알겠어요.

걷는 동안에는 내 안의 침묵이 방향을 알려줘요.

오늘처럼요.

내일은 로스 아르코스(Los Arcos)까지 약 스물한 킬로미터예요.

중간에 마을이 거의 없다는 지도를 떠올리며 물과 빵, 소금 캔디를 가방 가장 가까운 곳에 넣어두었어요.

헤드랜턴의 배터리를 확인하고 양말을 반으로 접어 넣자 마음도 반으로 가벼워졌죠.

불을 끄고 누우며 낮게 중얼거렸어요.

이 길은 거리보다 마음을 걷게 하는 방식으로 나를 단련시키고 있어요.

오늘의 마음만큼만, 내일도 천천히 걸어볼게요.

내일 구간은 급수 포인트가 드물 수 있어요.
물과 간단한 탄수화물, 소금 캔디를 여유 있게 준비해요.

9. 요약 7문장

1. 새벽의 차가운 공기와 여왕의 다리를 건너며 오늘은 강을, 그리고 내 마음의 강을 함께 건넜어요.

2. 겨울 끝자락의 포도밭에서 비어 있음이 약속이라는 걸 배웠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마음이 내 걸음을 밀어줬어요.

3. 마놀로스의 분수와 안드레아스의 말에서 길의 본질, 즉 다시 나를 만나러 가는 시간이라는 뜻을 다시 확인했어요.

4. 시러우키의 로마 도로 위에서 시간의 얇은 막을 밟는 감각을 온몸으로 느꼈고, 그 숙연함이 오래도록 남았어요.

5. 리에구의 따뜻한 점심과 비야투에르타의 햇살 속 느린 걸음은 “느려야 보이는 것들”을 선물처럼 보여줬어요.

6. 에스텔라의 회랑과 가스등, 포차와 피킬로, 그리고 가족의 발걸음은 함께 걷는다는 의미를 다정하게 설명해 줬어요.

7. 다섯 번째 밤, 내일의 물과 빵을 준비하며 깨달았어요, 이 길은 하루의 거리가 아니라 하루만큼의 마음을 걷게 한다는 사실을요.

10. 같이 읽으면 좋은 책

▸ 순례자 — 파울로 코엘료

산티아고 길에서의 체험과 영적 탐색을 담은 코엘료의 데뷔작이에요.

걷기의 이유를 다시 묻고 싶은 이들에게 좋은 길잡이예요.

▸ 여행의 기술 — 알랭 드 보통

목적지보다 ‘마음의 렌즈’를 갈아 끼우는 법을 보여주며 길 위의 감각을 섬세하게 확장시켜 줘요.

▸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 프레데리크 그로

느린 걸음의 사유를 안내하는 인문 에세이로 걷기가 삶의 태도가 되는 순간을 짚어줘요.

11. 내부 콘텐츠 글 추천

산티아고 순례길 시리즈 모아보기
일자별 후기, 구간별 팁, 숙소·식사·예산 정보를 한 곳에 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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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리스트로 출력해 바로 체크하며 준비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