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기 - 길 위에서 다시 만난 나

산티아고 순례길 27일차 | 내려가는 길,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엘 아세보(El Acebo) → 몰리나세카(Molinaseca)

아침 바다 2025. 7. 5. 15:38


밤새 비가 왔다

새벽 5시.
창밖에 빗소리가 들렸다.
살짝 열어본 창문 너머로
지붕 위를 또르르 구르는 물방울들.
비 오는 날의 길은 더 조심해야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잔잔했다.

크루스 데 페로에서 돌을 내려놓은 후
내 안에 쌓여 있던 무언가가
조금씩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

고요한 알베르게에서 짐을 챙기고,
비옷을 꺼내 입었다.
오늘은
비 속을 걷는 하루가 될 것 같다.


길은 내려가고, 물은 흘렀다

엘 아세보를 떠난 길은
곧바로 급경사 내리막으로 이어졌다.
길가엔 젖은 돌멩이들이
발을 잡아끈다.
스틱에 힘을 실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마치 명상하듯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중간중간
작은 물줄기가 길 위로 흐르고 있었다.
내려가는 물을 따라 걷는 기분.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리에고 데 암브로스(Riego de Ambrós), 잠시 숨을 고르다

비가 조금 잦아들 즈음,
작은 마을 리에고에 도착했다.
돌담 아래서 우비를 벗으며
배낭을 내렸다.

길가 벤치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하얗게 김이 올라오는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있으니
몸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젖은 옷과 신발,
그리고 말 없이 마주 앉은 다른 순례자.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의 쉼이 되어주는 순간이었다.


몰리나세카가 보였다

다시 길을 나섰다.
하늘은 흐렸지만
비는 멈춰 있었다.

길은 좁은 오솔길을 지나
점점 넓은 흙길로 바뀌었다.
그리고 멀리,
강과 함께 어우러진 마을 하나가
조용히 나타났다.

몰리나세카.
붉은 지붕과
돌로 된 오래된 다리,
그리고 잔잔한 강물.

참… 예쁜 마을이다.


다리 위에서, 잠시 멈추다

마을 입구의 돌다리(Puente Romano) 위에 섰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마음을 간질였다.

걷다 보면
어디에 멈춰야 할지,
무엇을 바라봐야 할지
어느새 알게 된다.

이곳은,
그냥 서 있어도 좋은 곳이었다.
걸어온 산들이
이 다리 너머로 멀어져 갔다.


따뜻한 욕조, 따뜻한 말

오늘은 작고 따뜻한 민박집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기로 했다.
'알베르게 산 니콜라스(Albergue San Nicolás)'
작지만 정이 가는 곳.
운 좋게 욕조가 있는 방을 배정받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피로가 녹아내리는 그 기분…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저녁은 알베르게 주인이 직접 만든 렌틸콩 스튜.
함께 식사한 브라질 순례자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오늘, 내려오면서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어요.
그분이 늘 말씀하셨죠.
‘삶은 결국, 내려오는 길에서 진짜 보인단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나는 마음을 다 풀지 못했다

돌 하나를 내려놓았다고 해서
모든 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돌을 놓았던 순간의 마음은
분명히 내 안 어딘가를 바꾸었다.

내려오는 길,
비가 젖힌 풍경,
그리고 강가 마을의 고요함이
그 마음을 다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