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25일차 | 바람이 길을 열어줄 때 – 아스토르가(Astorga) →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까지
문을 열자, 바람
아침 6시 30분.
알베르게 창을 여니, 바람이 먼저 얼굴을 스쳤다.
차갑지만 맑은 공기.
새벽을 깨우는 교회의 종소리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조용히 짐을 챙기고
아스토르가를 나섰다.
등 뒤로 천천히 사라지는 붉은 지붕들.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오늘은 새로운 경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순례자의 철도, 카사블랑카
아스토르가를 벗어나면
곧바로 카사블랑카(Casablanca)와 발라즈카르도(Balazote) 같은
작은 마을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길은 평탄하다가도,
조용히 경사가 시작된다.
길 옆으로는 철로가 이어지고
간간이 기차가 순례길 옆을 스쳐지나간다.
그 길을 바라보며 걷는 동안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인생도 어쩌면
평행선 위를 함께 걷는 순례인지도.
순례자 하나, 기차 하나.
서로 닿을 수 없지만,
언제나 가까이에 존재하는 길.
발레 델 카사도(Valle del Casaodo), 풀 냄새
들판 위로 부는 바람이 세차졌다.
3월의 고도에 들어서면서
들판의 풀잎이 흔들리고,
코끝엔 흙과 풀 냄새가 섞여 스며들었다.
잠시 멈춰 서서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기슭에는 눈이 살짝 덮인 흔적,
그리고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햇살.
60대의 몸은 조금씩 느려졌지만,
감각은 오히려 더 예민해진 것 같다.
젊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야 보인다.
에르미타 델 에세보(Ermita del Ecce Homo), 기도처럼
라바날로 가는 길목에는
작은 순례자 예배당이 하나 있다.
‘에르미타 델 에세보(Ermita del Ecce Homo)’
바람에 흔들리는 성모 마리아 깃발 아래
잠시 앉아 묵상했다.
“오늘 하루는,
내가 아닌 길이 이끌게 해주세요.”
기도처럼 속삭였다.
산 위로 오르는 길이
점점 더 가팔라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마음을 비우기 위한 다짐이었다.
라바날 델 카미노, 문 앞에서 숨 고르기
오후 2시 무렵,
드디어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에 도착했다.
자갈길을 따라 올라간 마을은
작고 소박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경건한 느낌이 감돌았다.
이 마을은 피게루아 산맥 앞에 선 마지막 쉼터.
내일 넘게 될 크루스 데 페로(Cruz de Ferro, 철십자가)를 앞두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곳이라고 했다.
알베르게 ‘구에스텔라(Gastella)’에 체크인.
통나무 벽과 따뜻한 조명.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공용 공간.
걷고, 멈추고, 쉬기에 딱 알맞은 곳이었다.
저녁, 촛불 아래서
저녁은 마을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렌틸콩 수프와 부드러운 치킨 스튜.
오늘은 와인보다 따뜻한 차를 택했다.
몸이 먼저 쉬고 싶어했으니까.
식사 후,
마을 수도원에서 열리는 성가 예배에 참석했다.
성가대의 목소리는 바람보다 부드러웠고
촛불 아래에서 들리는 아베 마리아는
마음을 잠잠하게 만들어주었다.
하루의 끝, 문턱에서
침대에 누워 내일을 생각했다.
크루스 데 페로,
그 오래된 철십자가 앞에서
나는 무엇을 내려놓게 될까?
그건 아마도
오늘까지 걸어온 모든 시간일지 모른다.
지나간 후회,
남겨진 상처,
놓지 못했던 이름들…
그 모든 것을
바람이 대신 데려가주기를 바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