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17일차 - 아무것도 없는 길, 그 안에 내가 있었다, –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 | 약 17.2km


17일차 | 아무것도 없는 길, 그 안에 내가 있었다
–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 | 약 17.2km**
어둠보다 고요했던 새벽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새벽 6시.
산타 클라라 수도원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렸다.
어제 하루를 정리하며, 나는 참 많은 생각을 했고
그 생각들은 아직 다 끝나지 않은 채
발끝으로 따라붙었다.
수녀님이 건네준 작고 따뜻한 빵 하나.
그리고 “부엔 까미노(Buen Camino)”라는 인사.
그것만으로도 길을 나설 용기가 생겼다.
길의 시작은 조용했다.
정적이 아니라,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한 침묵.
고요하되 비어 있지 않은 풍경.
바람도 나무도 없는 17km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를 벗어나면
바로 시작된다.
17km의 단절된 길.
마을도, 나무도, 쉼터도 없다.
그런데도 그 길은
무섭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왜일까.
한참을 걷다 보니 깨달았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으니,
그제야 ‘나’라는 존재가 뚜렷해졌다.
온전히 나와 함께 있는 시간.
그것이 이 고요한 길의 선물이었다.
뒤도, 옆도, 앞도 없는 듯한 길.
거기서 나는 오래된 내 생각들을 다시 꺼내 보았다.
지나온 인생,
후회했던 말들,
미뤄둔 용서.
그 모든 것이 바람 대신 내 곁을 스쳐갔다.
모래길에 남은 한 마디
걷던 중
누군가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남긴 글귀를 보았다.
“여기선 나도 시인이 된다.”
참 많은 걸 말해주는 한 문장이었다.
아무것도 없으니
가장 섬세한 감정이 떠오르는 곳.
아마 나도 그랬다.
이 고요 속에서
나도 나에게 오랜만에 말을 걸 수 있었다.
칼사디야의 마을이 보일 무렵
11시가 조금 넘어서
멀리서 돌담과 지붕이 보였다.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
너무 작고 조용해서
마치 고요한 땅 위에 조용히 앉아 있는 마을 같았다.
숙소는 알베르게 ‘알베르토’.
마을 전체가 쉼터처럼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무겁게 느껴졌던 가방을 내려놓고
처음으로 마을의 분수대 옆 벤치에 앉아
햇살 아래 눈을 감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충분한 하루였다.
나는 오늘, 고요 속에서
‘아무것도 없다’는 건
사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그 공백 속에서
나는 오래된 나와 다시 만났고,
어쩌면 조금은 더 다정해진 내가 되어 있었다.
이 길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건
풍경이 아니라
그 풍경을 마주하는
나의 마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