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기 - 길 위에서 다시 만난 나

산티아고 순례길 10일차 - 느리게 걸을수록 깊어진다, 그라논(Grañón)에서 베로라도(Belorado)까지

아침 바다 2025. 6. 1. 08:02

 

 

느리게 걸을수록 깊어진다

– 산티아고 순례길 10일차 | 그라논(Grañón) → 베로라도(Belorado), 약 24km

 


 

교회 다락방에서 맞은 아침

 

새벽 6시,

그라논(Grañón)의 고요한 다락방.

천천히 눈을 떴다.

교회의 오래된 나무 창문 사이로

은은한 햇살이 들어왔다.

 

다락방 바닥에 깔린 매트리스,

몸을 감싼 조용한 기도,

밤새 고요했던 공간.

 

순례 10일째 아침,

60대의 몸은 처음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무릎도, 어깨도

어느새 길에 맞춰지고 있었다.

 

어제 밤, 키요시가 했던 이야기.

사랑을 떠나보낸 후에도

그 사랑을 다시 품게 되었다는 고백이

아직도 가슴에 여운처럼 남아 있다.

 


 

들판, 안개, 그리고 초록빛 싹

 

간단히 빵과 커피로 아침을 마치고

그라논을 나섰다.

 

마을을 벗어나자

카스티야 이 레온(Castilla y León)의 메세타 평원이 펼쳐졌다.

끝도 없이 이어진 들판.

 

3월 초의 아침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들판은 아직 잠든 듯 고요했지만,

연초록 새싹들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있었다.

 


 

마을의 분수 앞, 한 노인의 말

 

레돈데지요(Redecilla del Camino),

작고 조용한 마을.

 

분수 앞 벤치에 앉은 한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봄이면 순례자들이 피어나요.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당신들 같은 이들을 지켜보죠.”

 

짧은 인사였지만,

그 말이 오늘 하루의 시작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골든빛 들판과 커피 한 잔

 

카스타나레스 데 리오하(Castañares de Rioja)를 지나며

풍경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포도밭은 점점 사라지고,

대신 넓은 곡물밭이 이어졌다.

아직 파종되지 않은 맨땅이었지만,

그 속에 품고 있을 시간들이 느껴졌다.

 

빌라오리아(Villaría)의 작은 카페에서

토스타다와 커피로 짧은 휴식.

 

카페 주인 마누엘은 이렇게 말했다.

“순례자들의 걸음에서 계절을 느낍니다.”

 

봄에는 조심스럽게,

여름에는 서두르며,

가을엔 여유롭게 걷는다고.

그 말이 어쩐지 내 걸음을 돌아보게 했다.

 


 

오르막과 내려놓음

 

빌라마욜 데 몬하르딘(Villamayor de Monjardín)부터

경사가 조금씩 시작되었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자신의 리듬을 지키는 것.

 

예전엔 무조건 앞을 향해 달렸지만

지금은 안다.

빨리 가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내 페이스로 걷는 것이

진짜 순례라는 걸.

 


 

점심, 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

 

비야르타(Villarta) 마을에서 점심을 먹었다.

따뜻한 렌티하스 수프 한 그릇,

그리고 양고기 요리.

 

조용한 식당,

나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말없이 앉아

하루를 정리할 수 있어 좋았다.

 

지금 이 나이에,

이런 여유가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 같았다.

 


 

햇살 아래 마을이 빛났다

 

에스피노사 델 카미노(Espinosa del Camino)까지

피로가 밀려왔지만,

멀리 언덕 위

베로라도(Belorado)가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마을의 돌지붕을 부드럽게 비추고,

교회의 종탑이 반짝였다.

 

“다 왔구나.”

그 생각 하나로 힘이 났다.

 


 

베로라도에서의 밤

 

알베르게 ‘에스트렐라’.

깨끗하고 따뜻한 공간,

무엇보다 마사지 체어가 있어

하루 종일 걸은 다리에 큰 위로가 되었다.

 

저녁은 레스토랑 ‘엘 팔라시오’.

야채 볶음밥과 생선 요리,

그리고 리오하 와인 한 잔.

 

식사 중, 독일에서 온 60대 순례자 한스를 만났다.

“이제야 시간이 생겼고,

건강이 허락하니 이 길을 걸어요.

이 나이에도 새로운 걸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아요.”

 

그의 말에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우리 또래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뭔가가 있다.

 


 

별빛 아래 고요한 기도

 

식사 후,

산타 마리아 교회를 다시 찾았다.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

고요한 그 공간에

내 마음도 잦아들었다.

 

기도문 대신,

오늘 하루를 되새겼다.

그리고 내일을 살짝 그려봤다.

 


 

오늘, 나는

 

열 번째 밤.

이 길에 익숙해질수록

내 마음은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다.

 

처음엔 걱정이 많았지만

이젠 알 것 같다.

늦게 시작해도 괜찮고,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는 것.

 

내일은 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까지.

조금 더 깊고, 조용한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잘 걸었다.

오늘도,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