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순례길 30일차 | 안개 위에 놓인 마을–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 →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 | 약 27km
어둠보다 더 짙은 안개
새벽 6시.
비야프랑카의 골목은 짙은 안개로 덮여 있었다.
어제의 노을이 남긴 흔적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희뿌옇게 흐려졌다.
헤드랜턴을 켜고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익숙한 건 하나 있었다.
노란 화살표.
여전히 이 길의 등불처럼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조용히 알려주었다.
서서히 오르는 숨
길은 처음엔 부드러웠다.
강을 따라 완만하게 이어지는 시골길.
하지만 라파라(Laguna de Castilla)를 지나며
서서히, 그리고 확실히
경사가 시작됐다.
바람이 불고,
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숨이 차올랐다.
스틱에 의지해 한 걸음씩,
뒤돌아볼 틈도 없이 걸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차분했다.
마치
이 고갯길이
내 안의 오래된 굳은살을 하나씩 벗겨내는 기분.
낯선 고요, 낯익은 위로
중간에 잠시 멈춰
돌 위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어디선가 들꽃 향이 은은히 스며들었다.
노란 민들레와 보랏빛 들꽃이
언덕 중턱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말없이 나를 응원해주는 듯한 그 모습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다.”
그 말이
오늘 따라 더 진하게 다가왔다.
안개 위에 놓인 오 세브레이로
오후 3시 무렵.
드디어 오 세브레이로에 도착했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을은 구름과 안개 사이에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짙은 회색 돌지붕,
둥그런 초가 모양의 집들.
그리고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
정말,
이런 곳이 현실에 존재할 수 있구나.
순례자라서 만날 수 있었던 마을.
그 자체로 선물이었다.
성당 안, 무릎 꿇지 않아도 기도하게 되는 순간
오 세브레이로의 상징,
산타 마리아 라 레알 교회(Iglesia de Santa María la Real).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순례자 교회 중 하나.
내부는 소박하고 어두웠지만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말할 수 없이 따뜻했다.
자리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저절로 말해지는 느낌.
그게 기도라는 걸
처음으로 실감했다.
저녁, 벽난로 옆에서
알베르게는 고풍스러운 돌집이었다.
벽난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젖은 옷을 말리며
따뜻한 레몬차를 마셨다.
옆자리의 노르웨이 순례자는
자신이 가져온 손수건에
오늘의 날짜를 꿰매고 있었다.
“이 날은, 내 인생의 전환점일 거예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런 느낌이었다.
오늘 하루,
무언가 분명히 달라졌다.
오늘, 나는 산을 넘었다
이 길의 절반을 넘었고
가장 험한 고갯길을 지나왔다.
발은 아프고
종아리는 뻐근했지만
내 마음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내려놓은 마음,
새로 움튼 용기,
그리고 안개 속에서 피어난 작고 단단한 평화.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