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기 - 길 위에서 다시 만난 나

산티아고 순례길 12일차 - 도시의 빛 속에서, 또 한 번 나를 만나다, 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에서 부르고스(Burgos)까지

아침 바다 2025. 6. 1. 09:10

시레라 데 아타푸에르카(Sierra de Atapuerca) 유적지 입간판

도시의 빛 속에서, 또 한 번 나를 만나다

– 산티아고 순례길 12일차 | 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 → 부르고스(Burgos), 약 28km

 


 

수도원의 종소리, 하루의 첫 숨

 

새벽 6시,

조용한 종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간.

 

산 후안 데 오르테카의 수도원.

어젯밤,

수도사들의 그레고리안 성가가 교회에 울려 퍼졌던 그 공간.

그 고요와 울림이

밤새 나를 감싸고 있었다.

 

60대가 되며 잠은 얕아졌지만,

이곳에서는 깊이 잤다.

육체의 피로와 영혼의 평온이 만났을 때,

사람은 깊이 잠든다.

 


 

“부엔 까미노”라는 인사 하나가

 

간단한 아침 식사 후,

수도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길을 나섰다.

“부엔 까미노(Buen Camino)”

 

그 짧고 따뜻한 인사가

오늘 하루의 걸음에 힘을 불어넣는다.

 

걷는다는 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씩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평원의 여백을 따라

 

아게스(Ages)까지는 평탄한 길.

들판은 여전히 갈색,

그 사이로 연초록이 아주 살짝 번지고 있었다.

 

아게스는 작은 마을이었다.

몇 채의 집, 작은 교회, 그리고 조용한 분수.

 

그곳에서 만난 프랑스인 피에르.

그는 아내와 함께 순례 중이었다.

 

“은퇴 후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이

가장 값집니다.”

 

그의 말이

오래도록 여운처럼 남았다.

나 역시 언젠가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오래된 땅을 걷는 감각

 

아트아푸에르카(Atapuerca)로 가는 길.

이곳은

80만 년 전 인류의 흔적이 남은 고고학의 땅이다.

 

그 긴 시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길을 걷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섰을까.

 

내가 지금 걷는 이 길도

그들의 이야기 위에 놓여 있는 셈이다.

 

마을의 작은 박물관에서

선사시대 유물을 둘러보았다.

60대가 되며

나는 과거에서 현재를 읽게 되었다.

 

젊을 땐 오직 미래만을 보았지만,

지금은 과거가 현재를 더 깊게 만들어준다.

 


 

도시가 가까워질수록

 

카를데뇨사(Cardeñuela Riopico)를 지나

멀리 부르고스의 대성당 첨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르바네야 리오피코(Orbaneja Riopico)의 작은 식당에서

마늘 수프와 토르티야로 점심을 해결했다.

 

마늘의 따뜻함이

속을 데워주고,

사람들의 소박한 스페인어가

마음을 데워주었다.

 

이젠

언어는 도구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읽는 일이 되었다.

 


 

도시의 풍경, 낯설고 또 반가운

 

점점 가까워지는 부르고스(Burgos).

차들이 지나는 소리,

사람들,

상점과 신호등.

 

며칠간 자연 속에 있었던 몸에게

도시는 낯설었지만,

또 반가웠다.

 

그리고

마침내 눈앞에 나타난 대성당.

고딕 양식의 거대한 건축물.

 

숨이 잠시 멎는 것 같았다.

이 길 위에서 마주한

가장 웅장한 시간.

 


 

오늘의 쉼, 에미아우스

 

도심의 알베르게 ‘에미아우스’에 도착했다.

현대적인 시설, 따뜻한 샤워,

그리고

무거운 다리를 위한 포근한 침대.

 

60대의 몸이지만,

28km를 걸은 오늘도

꽤 괜찮았다.

 


 

고딕의 안에서 마주한 시간

 

오후에는 부르고스 시내를 걸었다.

대성당 내부는

빛과 그림자, 조각과 유리로 이루어진 세계였다.

 

엘 시드,

스페인의 영웅.

그의 무덤 앞에 섰다.

 

역사와 인물과 나라는 경계를 넘어

한 인간의 삶이 느껴졌다.

그것이 순례가 가진 깊이일 것이다.

 


 

타파스, 그리고 또 하나의 만남

 

저녁엔 타파스 바.

모르시야(부르고스식 순대),

퀘소 데 부르고스(부드러운 치즈),

그리고 와인 한 잔.

 

식당에서 만난 독일인 클라우스.

70대 후반,

다섯 번째 순례 중이라고 했다.

 

“걸을수록, 더 많은 걸 내려놓게 됩니다.”

 

그의 말은

순례의 정의 같았다.

많이 걷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내려놓는 여정.

 


 

도시의 밤, 천천히 물들다

 

대성당의 조명이 켜지고

부르고스의 밤이 시작되었다.

 

낯선 도시를 걷는 익숙한 발.

고요했던 며칠과

이제 북적이는 이 밤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오늘, 나는

 

수도원의 침묵에서

도시의 빛까지,

길 위의 하루를 꽉 채워 걸었다.

 

젊은 날에는

도착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그 도착까지의 모든 과정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메세타 구간.

많은 순례자들이 그 길을 ‘지루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단조로움 속에서

나 자신을 더 많이 마주하게 될 것 같다.

 

이제는

빨리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깊게 도착하고 싶다.

 


 

시레라 데 아타푸에르카(Sierra de Atapuerca) 유적지
부르고스(Burgos) 대성당
부르고스(Burgos) 시내에 위치한 “삼 형제 기둥(Monumento de los Tres Reyes)” 또는 “세 왕의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