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11일차 - 산 너머, 마음은 더 가벼워졌다, 베로라도(Belorado)에서 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까지
산 너머, 마음은 더 가벼워졌다
– 산티아고 순례길 11일차 | 베로라도(Belorado) → 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 약 26km
이른 아침, 익숙한 차가움과 익숙한 고요
새벽 6시.
베로라도의 창문을 열자
맑고 찬 3월의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쌀쌀했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아침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시간이 되었고,
이 고요함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것이
요즘의 가장 큰 사치 같다.
조용히 일어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빵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직 어둠이 덜 걷힌 길,
나는 또 한 걸음을 내딛었다.
메세타의 시작, 황량함 속의 예고된 푸름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메세타(Meseta)의 끝없는 평원이 펼쳐졌다.
3월의 들판은 아직 겨울의 흔적을 안고 있었지만
어딘가, 봄이 오고 있다는 징후들이 보였다.
햇살이 스치듯 내려앉은 갈색 흙과
어렴풋이 고개를 든 새싹들.
바람은 차가웠지만 상쾌했고,
산맥의 실루엣이 멀리 아른거렸다.
앞으로 넘을 고개를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조용히 말했다.
“천천히 가자. 오늘도 괜찮을 거야.”
오르막, 그리고 중년의 호흡
비야프란카 몬테스 데 오카(Villafranca Montes de Oca)로 향하는 길은
조금씩, 조금씩 고도를 높였다.
오카 산맥의 시작.
나이가 들수록
페이스를 조절하는 감각은 더 정교해진다.
젊을 땐 무작정 밀어붙였던 것들이
지금은 ‘멈춤’과 ‘호흡’으로 더 깊어졌다.
길가에 핀 들꽃 하나,
햇살에 반짝이는 돌 하나에도
걸음을 멈추게 된다.
멈춤이 곧 감동이 되는 나이.
작은 마을, 깊은 격려
비야프란카에 도착하자
중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조용한 마을이 펼쳐졌다.
산티아고 교회 앞 벤치에 앉아
지나온 길을 바라보았다.
“당신처럼 연세 있으신 분들이 더 자주 와요.
나이는 숫자일 뿐이죠.”
커피를 내주던 카페 주인의 말.
그 짧은 격려가
몸보다 마음을 먼저 일으켜 세웠다.
모나코 고개, 나이로 쌓은 인내의 산
그 뒤로는 모나코(Monoco) 고개.
해발 1,150m.
이날의 가장 큰 도전.
경사는 가팔랐고
걸음은 느려졌지만
멈추진 않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높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보다 더 높은 감정들을 많이 넘어서 왔기 때문일까.
정상에 오르자
지나온 길이 발아래 펼쳐졌다.
그 길 위에 나의 지난 10일이,
그리고 살아온 시간들이 겹쳐 보였다.
내리막, 그리고 장비의 위로
산을 넘었다고 끝이 아니었다.
이젠 긴 내리막.
무릎에 부담이 가는 길.
하지만 스틱을 쥔 손은 든든했고,
걸음은 여전히 단단했다.
나이 들수록 필요한 것은 속도보다
나를 도와주는 도구와 여유라는 것을
이 길에서 자주 배운다.
고요한 숲, 도시락 한 끼
숲 속 쉼터에서
샌드위치와 사과 하나로 점심을 먹었다.
새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내 씹는 소리만 들리는 공간.
도시에서는 쉽게 가질 수 없는 고요.
이 단순함이 마음을 정돈시켰다.
산 후안 데 오르테가, 순례자의 쉼터
오후 4시경,
드디어 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에 도착했다.
이곳은 순례자들의 중요한 중간 지점.
작은 수도원과 몇 채의 집만 있는 고요한 마을.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다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 체크인하고,
곧바로 교회로 향했다.
조용한 돌기둥 사이, 깊은 명상
교회는 단순했지만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치와 기둥이
오히려 경건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성인의 묘 앞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믿음의 유무와 관계없이,
어느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말없는 기도가 피어오르는 때가 있다.
이곳이 그랬다.
수프와 웃음, 순례자의 저녁
공동 식사 시간.
따뜻한 수프와 빵, 과일.
음식은 소박했지만
함께 먹는다는 그 사실이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75세의 이탈리아 순례자 지오바나.
“몸은 늙어도, 마음은 젊어요.”
그녀의 눈빛은,
오늘 걸어온 오카 산맥보다 더 빛나 보였다.
노래 같은 밤
저녁 예배에 참석했다.
수도사들의 그레고리안 성가가
조용히, 천천히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음악이 아니라
기도였고, 숨결이었다.
그 순간,
나는 종교를 초월해
인간의 아름다움에 조용히 감탄했다.
오늘, 나는
산을 넘었고,
한 걸음씩 내 속도를 지켰으며,
누군가의 말에 다시 용기를 얻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늦게 출발해도 좋고,
천천히 가도 괜찮다는 것.
내일은 부르고스(Burgos),
조금 더 복잡한 길이 기다릴 테지만
오늘 이 평온을 품고 걸어가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