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기 - 길 위에서 다시 만난 나

산티아고 순례길 8일차 - 로그로뇨(Logroño)에서 나헤라(Nájera)까지, 봄의 문턱에서 와인을 마시다.

아침 바다 2025. 5. 27. 06:37

로그로뇨(Logroño)에 순례자 조각

 

 

봄의 문턱에서 와인을 마시다

– 산티아고 순례길 8일차 | 로그로뇨(Logroño) → 나헤라(Nájera), 29km

 


 

도시의 이별은 언제나 복잡하다

 

아침 일찍,

조용히 로그로뇨(Logroño)를 빠져나왔다.

 

3월 초의 공기는 생각보다 더 매서웠고,

장갑을 끼고 두꺼운 재킷을 입었지만 손끝이 얼얼했다.

도시를 떠나는 길은 익숙하면서도 복잡했다.

여기저기 갈라지는 길,

표지판보다 믿음직한 건 여전히 노란 화살표 하나뿐이었다.

 

도심을 벗어나자,

포도나무 가지들이 줄지어 늘어진 리오하(La Rioja)의 풍경이 펼쳐졌다.

잎이 나지 않은 벌거벗은 가지들이

어딘가 슬프면서도 단정했다.

겨울의 끝자락, 봄을 기다리는 침묵의 밭들.

 


 

테이핑 하나가 바꾼 하루

 

오늘은 아침에 발에 테이핑을 했다.

어제 민지가 알려준 대로

물집이 생기기 쉬운 부분을 미리 감싸보았다.

 

처음엔 이질감이 있었지만

걷다 보니 발이 한결 가벼워졌다.

누군가의 경험이 또 다른 누군가의 발을 지켜준다는 것,

이 길 위에서는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와인, 햇살, 그리고 아직 깨어나지 않은 가지들

 

나바레테(Navarrete)까지는

주로 포도밭 사이를 따라 걷는 길이었다.

 

갈색빛 흙 위에

묵직하게 뿌리 내린 포도나무들.

아직은 잠든 모습이었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와인의 시간들이 느껴졌다.

 

길가 와이너리 앞에서

뜻밖의 투어에 참여하게 되었다.

 

작은 공간, 적은 인원,

3월의 한가로운 오전이 주는 선물 같은 시간.

와인 만드는 과정을 듣고

아침 햇살 아래 작은 잔에 담긴 ‘템프라니요’ 한 모금.

몸이 슬며시 풀리는 느낌이었다.

 


 

나바레테의 정오

 

나바레테의 교회,

산타 마리아 데 라 아순시온(Church of Santa María de la Asunción)은

화려한 르네상스식 정문이 인상 깊었다.

 

교회 안에 앉아

등을 식히며 잠시 숨을 골랐다.

기둥 사이로 스며드는 빛,

한가로운 정오의 냄새.

 

근처 작은 식당에서 ‘메누 델 페레그리노’를 시켰다.

노란 파에야, 산뜻한 샐러드,

그리고 달콤한 아로스 콘 레체(Arroz con Leche).

 

조금 전 와이너리에서 들은 설명을 떠올리며

입 안에 남은 와인의 향을 천천히 음미했다.

순례길이란

그저 걷는 것이 아니라,

한 모금 한 숟갈에도 기억이 깃드는 여정이었다.

 


 

봄의 징후들

 

벤토사(Ventosa)를 지나며

풍경이 조금씩 변했다.

 

포도밭 사이에

올리브 나무와 아직 여물지 않은 곡물밭,

그리고 길가에 핀 하얀 아몬드꽃과 노란 유채꽃.

 

누군가는 걷느라 보지 못할 장면들,

나는 그걸 느리게 걸으며 본다.

걷는 속도만큼 마음도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다.

 


 

로마의 기억을 품은 작은 마을

 

트리시오(Tricio),

작은 마을에 숨겨진 오래된 교회.

 

산타 마리아 데 아르코스(Church of Santa María de Arcos)는

로마 신전 위에 지어진 중세 교회였다.

안에 남아 있는 기둥 하나하나가

수세기의 시간을 버텨온 흔적이었다.

 

그늘지고 서늘한 교회 안에서

몇 분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저, 그 시간 속에 함께 머무는 느낌.

 


 

나헤라, 붉은 절벽의 도시

 

해가 기울 무렵,

드디어 나헤라(Nájera)에 도착했다.

 

강변 도시, 붉은 절벽과 물길이 만나는 그곳.

지친 몸을 알베르게 ‘산티아고 아포스톨’에 맡겼다.

따뜻한 샤워 후 확인한 발 상태,

새로운 물집은 없었다.

 

테이핑 하나에

오늘 하루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몸이 먼저 알려줬다.

 


 

나헤라의 밤, 그리고 작은 감동

 

수도원, 산타 마리아 라 레알(Monasterio de Santa María la Real).

왕실의 무덤이 있고

동굴 속에 숨은 성당이 있는 이곳은

역사라는 단어로는 다 담기지 않을 만큼 신비로웠다.

 

저녁엔 ‘라 글로리아’에서

리오하 전통 요리를 맛봤다.

파타타스 아 라 리오하나,

챠물라스,

그리고 잔잔하고 깊은 크리안사 와인 한 잔.

 

그곳에서 만난 아일랜드 부부,

패트릭과 메리.

70대 후반의 그들이

웃으며 말하던 “이 길은 우리 인생 최고의 선물”이라는 말.

 

내게 큰 울림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이렇게 따뜻하게 증명하는 사람들.

 


 

오늘, 나는

 

강가를 걸으며 밤을 맞았다.

물소리가 잔잔하게 마음을 감쌌다.

별이 떠 있는 하늘 아래,

하루를 조용히 정리했다.

 

이제 순례길을 시작한 지 일주일.

이 리듬이 익숙해졌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감사하다.

 

내일은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까지 21km.

조금 짧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핑도, 만남도, 와인도

오늘은 모든 것이 꼭 맞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 모든 순간에 충분히 젖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