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4일차 - 팜플로나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용서를 지나 흐르는 다리 위로
산티아고 순례길 4일차
팜플로나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용서를 지나 흐르는 다리 위로
도시를 벗어나, 다시 길 위로
아침 일찍 팜플로나를 나섰다.
좁고 복잡한 골목 사이로 이어진 노란 화살표를 따라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
잠에서 막 깨어난 듯한 도시를 뒤로하니
마음이 다시 가벼워졌다.
차 소리, 사람 소리, 바쁜 리듬이 서서히 멀어지면서
나의 걷는 리듬이 돌아왔다.
고개의 이름은 용서
**시수르 마요르(Cizur Mayor)**를 지나며
멀리 **알토 델 페르돈(Alto del Perdón)**이 눈에 들어왔다.
‘용서의 고개’.
이름부터 마음을 붙드는 곳이었다.
오르기 전, 배낭을 내려두고
발을 조심스레 살펴봤다.
물집은 여전했지만, 더 나빠지진 않았다.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에너지 바 하나, 물 한 모금.
짧은 숨을 고르고
다시 배낭을 짊어졌다.
오르막의 고요한 고통
오르막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돌이 많은 흙길 위,
한 걸음씩 천천히 숨을 모으며 걸었다.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면
팜플로나의 붉은 지붕과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높이 오를수록 세상은 작아지고, 마음은 넓어졌다.
정상에 다다르자, 바람이 먼저 맞아주었다.
시원하고도 거센 바람.
그리고 철제 조각상.
“바람이 당신의 길을 지우더라도,
별들이 당신을 안내할 것이다.”
철판 위에 새겨진 그 문장은
이 길의 모든 순간을 안아주는 듯했다.
순례자 형상들이 바람을 맞으며 걷고 있었다.
마치 나 자신을 본 듯,
조각상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반가운 한국어, 낯익은 얼굴
사진을 찍기 위해 누군가에게 부탁했다.
그녀의 이름은 지수, 서울에서 왔다고 했다.
생장피에르포르에서부터 비슷한 일정을 걷고 있단다.
짧은 인사였지만,
고향 말로 나눈 몇 마디가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낯선 길에서 만난
익숙한 온기.
내리막의 주의, 그리고 점심
내려가는 길은 더 어려웠다.
돌길은 미끄러웠고, 무릎엔 통증이 올라왔다.
발가락은 신발 앞쪽에 부딪히고
발목도 살짝 접질렀다.
하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다.
이럴 땐 등산 스틱이 참 든든했다.
**우터가(Uterga)**에서 점심을 먹었다.
작은 식당, 순례자 메뉴.
렌틸 수프, 생선 요리, 그리고 과일 한 접시.
식사 중 마을 어르신이 말을 걸어왔다.
“순례자들이 우리 마을의 활력소예요.
당신들이 지나가야, 이 마을도 숨을 쉬는 것 같아요.”
그 말이, 길 위를 걷는 내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8각의 신비, 에우나테 교회
**무루사발 데 안디온(Muruzábal de Andión)**을 지나
길을 조금 벗어나 찾은 산타 마리아 데 에우나테.
8각형의 신비한 성소.
중세의 시간에 멈춘 듯한 이 교회는
말없이 모든 걸 품고 있었다.
회랑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작은 바람 소리와 함께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느낌.
그게 오히려 자유로웠다.
포도밭 사이로, 저녁 햇살 아래
오브라노스를 지나며
풍경은 더욱 평화로워졌다.
포도밭, 올리브 나무,
그리고 늦은 오후의 햇살.
빛이 낮게 깔리고
포도잎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말없이 걸어도 좋은 구간.
걸음마다 바람이 스며들었다.
여왕의 다리 위에서
오후 5시,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 도착했다.
마을의 이름은
11세기 나바라의 여왕이 순례자들을 위해 지은
다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석양이 다리를 감싸던 그 순간,
돌로 된 아치 너머에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이 길 위에 내가 있다’는 실감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
고요한 알베르게, 평온한 저녁
‘알베르게 야코베오’에 묵게 되었다.
옛 수도원을 개조한 숙소는
돌벽과 아치형 천장이
중세의 그림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줬다.
샤워 후, 발을 관리하는 일은
이제 매일 저녁의 의식이 되었다.
물집을 소독하고, 새 반창고를 붙이며
내일도 잘 걸을 수 있기를 조용히 바랐다.
조용한 교회, 조용한 대화
저녁 식사 후
**산티아고 교회(Iglesia de Santiago)**에 들렀다.
12세기의 산티아고 조각상이 있는 작은 교회.
불 꺼진 내부, 촛불 몇 개.
그 앞에 앉아 한참을 있었다.
믿음이 없어도
경건한 마음이 생기는 곳.
그 조용함이
하루의 끝을 감싸주었다.
오늘의 마지막 이야기
알베르게로 돌아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리사와 대화를 나눴다.
“60년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았어요.
이제는 나를 위해 걷고 싶었죠.”
그녀의 말이
내 가슴에도 조용히 내려앉았다.
나를 위한 시간,
내가 나를 위해 선택한 길.
그게 바로 이 길이라는 걸 다시 확인한 밤.
내일을 생각하며
내일은 **에스텔라(Estella)**까지.
약 22km.
아직 발은 성치 않지만,
마음은 여전히 앞으로 향해 있다.
이 길 위에 내일도
걸음 하나, 생각 하나, 그리고 만남 하나가 더해질 것이다.
눈을 감으며
조용히 그렇게 믿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