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2일차 -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까지, 숲과 안개 사이를 걷다
산티아고 순례길 2일차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까지, 숲과 안개 사이를 걷다
어제의 피로, 오늘의 걸음
아침 6시.
도미토리 안은 이미 바스락거림과 속삭임으로 가득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자, 천장의 낮은 불빛이 서서히 시야를 깨웠다.
물집은 어제보다 더 커져 있었다.
조심스레 반창고를 떼어내고 새것으로 갈았다.
두 겹의 양말을 신으며 마음속으로 하루의 각오를 다잡았다.
다시 배낭을 메는 이 감각.
하루 전보다 익숙했지만, 여전히 가볍지는 않았다.
고요한 안개 속, 숲으로 들어서다
알베르게를 나선 순간, 론세스바예스는 안개에 잠겨 있었다.
마치 구름 속을 걷는 듯한 기분.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서서히 안개를 걷어냈다.
그 사이로 반짝이는 거미줄이 나타났다.
보석처럼 빛나는 그 모습에, 숨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봤다.
함께 출발한 존과 사라는 영국에서 온 부부였다.
결혼 25주년을 기념해 이 길을 걷기로 했다고 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나란했고, 눈빛은 오래된 연인처럼 따뜻했다.
그런 둘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누군가와 함께 걷는 삶을 상상했다.
비스카레타를 향해
길은 점점 내리막으로 이어졌다.
스페인 쪽 피레네 경사면을 따라 걷는 중이었다.
발걸음은 가벼워졌지만, 무릎은 어제 받은 충격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픈 무릎을 달래며 걷다 보니
조용한 시골 마을 **린소아인(Linzoain)**에 도착했다.
광장 중앙의 작은 분수에서 목을 축였다.
그곳에서 만난 이탈리아인 마르코는 오래된 순례자였다.
“소금물에 발 담그는 걸 잊지 마세요.”
짧은 조언이지만, 그 말이 낯설게 따뜻했다.
에스파이날에서의 점심
걷다 보니 작은 마을 **에스파이날(Espinal)**에 닿았다.
카페에 들어가 ‘복디요’와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간단한 식사였지만, 꽤 든든했다.
창밖에선 여전히 순례자들이 묵묵히 지나가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과 한 잔의 주스가 주는 위로.
그런 게 이 길엔 종종 있다.
비에 젖고, 다시 햇살 아래
오후 들어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덮여 있던 구름이 그대로 비가 되어 쏟아졌다.
서둘러 배낭에서 비옷을 꺼냈지만, 이미 어깨와 팔은 젖고 있었다.
비는 오래가지 않았다.
15분쯤 지나자 다시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젖은 옷이 금세 마르며, 몸에서도 증기처럼 피로가 빠져나갔다.
죽음의 다리를 지나며
수비리를 향한 마지막 구간은 가파른 내리막이었다.
특히 **‘죽음의 다리(Puente de la Rabia)’**라 불리는 곳을 향한 길은 조심스럽게 걸어야 했다.
12세기에 지어진 이 다리는
광견병을 치유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 위를 건널 때, 아르가(Arga) 강이 바로 아래서 흐르고 있었다.
맑고 깊은 물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모든 것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위로가 되는 순간이었다.
수비리, 또 다른 휴식의 이름
오후 4시.
마침내 **수비리(Zubiri)**에 도착했다.
마을은 작고 조용했지만, 어딘가 아늑한 기운이 감돌았다.
‘엘 페레그리노’라는 이름의 알베르게에 머물기로 했다.
도미토리에는 50명 넘는 순례자들이 함께 묵고 있었다.
벽마다 전 세계에서 온 이들의 메시지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누군가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이 길의 끝에서 나는 누구일까.”
샤워를 마치고 발을 다시 살폈다.
물집은 더 커져 있었고, 다소 불편했다.
하지만 하루를 걸었다는 사실이
그 통증마저 견디게 했다.
파에야, 와인, 그리고 제니퍼의 이야기
저녁은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공동 식사.
파에야와 샐러드, 그리고 와인 한 잔.
간단하지만 이 길 위에서는 축제 같은 한 끼였다.
식사 자리에서 만난 제니퍼는 캐나다에서 왔다고 했다.
암 투병 후 완치를 기념해 이 길을 걷고 있다고 말했다.
“매일 힘들지만,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있어요.
그게 고마워요.”
그 말이 가슴속에서 오래 맴돌았다.
이 길을 걷는 모두는 어떤 ‘완치’를 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마음의, 관계의 회복 말이다.
석양 아래 아르가 강을 걷다
식사 후, 마을을 산책했다.
아르가 강을 따라 걷다 바위 위에 앉았다.
흐르는 물소리, 석양이 비친 수면,
그리고 오늘의 피로.
이 시간은 어떤 위로보다 따뜻했다.
고된 하루가 물 위에 흘러가는 듯했다.
말없이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침대 위, 내일의 지도를 펼치며
알베르게로 돌아와 내일의 경로를 살폈다.
팜플로나까지 약 20km.
도시로 진입하는 길은 복잡해 보였지만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듯한 자신감도 생겼다.
몸은 피곤했지만
오늘 만난 풍경과 사람들의 말이 마음을 채웠다.
여전히 물집은 아프고
무릎은 뻐근했지만
오늘은 괜찮았다.
그 모든 불편함 위로
아르가 강의 물소리가 흐르고 있었으니까.